"사실 진심인 척 했을 뿐인데, 척하다보니 결국 진심이 되어 버렸구나"
《위험한 관계》(Les Liaisons dangereuses)는 1782년에 출판된 피에르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소설이다. 이미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가 리메이크 버전으로 많이 만들어졌다.
줄거리를 간략하게 말하자면, 18세기로 추정되는 시기를 배경으로 진행되는 당시 남녀 간에 타락한 풍속과 사랑을 담고 있다. 주인공 조원(배용준)과 조씨부인(이미숙)은 사촌지간이지만 어렸을 때 서로 연정을 품었다. 그러나 조씨부인은 원하지 않은 혼례를 하고 조원 역시 혼례를 하지만 부인이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된다. 당시 엄격한 유교사회에서 두 사람은 각자 풍속에 어긋나는 생활을 하는데, 조원(배용준)은 떠나간 아내에 대한 절개를 지킨다고 하지만 여러 여자와 추문을 일으키는 난봉꾼 생활을 하게된다.
그럼에도 조원은 옛사랑인 조씨부인에 대한 연정으로 조씨부인에게 내기를 하자고 한다. 역병을 피해 서울로 온 숙부인(전도연)의 정절을 취하는 것이다. 혼례를 하기도 전에 죽은 지아비에 대한 정절을 9년 동안 지켜온 그녀를 범해서 혈흔을 가져오면 조씨부인은 조원에게 몸의 문을 여는 것이다. 하지만 실패하면 조원은 스님이 되는 것이다. 가장 위험하면서도 가슴 아픈 게임이 시작된다.
1. 바람둥이의 스킬
조원(배용준)은 이 영화에서 일종의 바람둥이다. 바람둥이는 똑똑해야 하고 센스가 있어야 한다. 지금으로 치자면 이빨도 잘 까야하고 노래도 잘 불러야 한다. 조원은 그림을 잘 그리는 것으로 나오는데, 그 그림의 장르가 춘화다. 자신과 정을 통하는 상대 혹은 그 상황을 그림으로 그려내는데, 신윤복과 김홍도가 울고 갈 정도다. 그림을 잘 그리려면 무엇보다 관찰력이 좋아야한다. 관찰력이 좋아야 한다는 것은 남들이 보지 못한 부분까지 캐치해내는 센스가 필요하다. 그 섬세한 센스 역시 바람둥이라면 가져야할 필요 요소인데 조원은 그것을 갖췄다.
또한 영화 중간에 수시로 오고갔던 편지들은 지금으로 치면 카카오톡이다. 흔히 인터넷에서 '야카오톡'으로 올라온 카톡 캡쳐화면을 볼 때면 내가 보기에도 민망해서 눈을 어디에 둬야될 지 모를 연애 루저들의 절절함이 배어있다. 썸을 타는 상대와 카톡을 할 때면 무심함과 쿨내가 풍기면서도 아련함이 베어있는 글을 적절한 시간차 공격으로 전송해야 한다. 조원은 율곡 이이와 퇴계 이황이 울고갈 명문으로 숙부인(전도연)을 공략하고 있다.
세번째로는 이빨이다. 우리는 주위에서 동성들 사이에서는 스티브 잡스의 언변을 갖지만, 이성과 함께 할 때면 스티븐 호킹 박사님이 되는 경우를 자주 목도한다(저는 스티븐 호킹 박사님을 최고의 물리학자로서 존경합니다. 저는 그분을 전혀 비하할 의도는 없음을 헤아려주셈). 남녀가 유별해야 하는 가장 적정한 거리에서 숙부인과 밀당하면서 애태우게 하는 그의 대화 스킬은 오늘도 야카오톡을 보내고 새벽에 이불킥을 하는 이 땅에 수백만 연애 루저들이 배워야 할 점이다. 물론 영화에서 이뤄지는 대화는 다소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도 있긴 했지만, 200여년 이라는 시대 차이를 감안해야겠다.
네번째는 스킨십이다. 밤에 월담을 하여 숙부인을 품에 안을 수 있었음에도 쿨내 나게 뒤돌아서서 숙부인을 애태우고, 비 오는 날을 골라 강화도까지 찾아가서 비 샤워를 하며 숙부인을 공략했던 조원이었다. 단 한발의 총알을 가진 사냥꾼처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러다 스스로 조원이 있던 절로 찾아온 숙부인과 절간 뒤에서 입을 맞추게 되고 숙부인은 무너진다. 그럼에도 더 이상의 선을 넘지 않으므로써 숙부인에게 '이 남자'라는 헛된 믿음을 품게 한 후에야 가장 기본적이면서 최고의 방중술로 숙부인과의 쾌락에 빠져든다.
마지막은 마음을 담은 센스있는 선물이다. 처음에 그녀에게 건넨 선물은 '차'였다. 당시에는 커피가 없어서 식후에 아메리카노를 때릴 수 없었는지라, 아녀자들은 차를 달여 마시곤 했다. 즉 언제나 매일 하루에 한번씩 마시면서 그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최면 장치인 것이다. 그리고 나온 선물은 <열하일기>와 100%실크로 된 조선 스카프였다. 가장 정열적인 빨간색으로 그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조원에게 모든 마음을 주고 배신당하면서도 땅에 떨어진 그 스카프를 챙기고, 마지막 순간을 함께할 정도로 애틋했던 숙부인의 마음의 표현물이었다. 현재 선물이랍시고 여자친구한테 사이즈가 안 맞고 색깔이 꽝인 속옷을 선물하거나 자신의 취향만을 생각한 흰색 레깅스를 건네주는 루저들은 이 지점에서 또다시 반성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골고루 갖춰지지 않으면 조원의 수족 '자그노미'나 '춘향전' 이몽룡의 '방자' 신세를 벗어날 수 없다. 혹은 현재 아는 사람들과의 술자리에서 썸타는 두 사람에게 "사겨라, 사겨라"라고 외치기를 수십 번 해오면서 속으로 쓰린 마음을 억눌러야 했던 연애 루저들은 지금 뜨끔할 지도 모른다.
2. 끝없는 악순환 게임
그럼에도 이 지점에서 나는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라는 시구를 인용하고 싶다. 조원과 조씨부인은 각자 아주 능숙한 스킬로 순진한 이성들을 취했다. 하지만 이들은 영화에서 고백하듯 처음에는 서로의 상대만이 전부인 때가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 속에 상처가 생기고 아주 이기적으로 다른 사람의 상처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치료했다. 마치 그 상처는 역병과 행운의 편지와도 같아서 또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줘야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생성하는 것이다.
조원과 조씨부인은 서로에 대한 사랑이 아무 관련 없는 사람들에 대한 상처주기 게임이 되었고, 그렇게 자신들의 상처를 치료해 나가는 듯 했다. 조씨부인은 이 소설의 결말이 행복한 결말이 된다고 말했지만 되돌아온 것은 그 당시 사회에서의 파문과 추악한 상처로 더럽혀진 자신의 모습 발견이다. 조원은 피를 많이 흘린 채 갯벌에 얼굴을 파묻으며 죽음을 맞았고, 1988년 작 <위험한 관계>에서 마지막에 메르퇴이유 부인(글렌클로즈)가 거울의 비친 자신의 추악한 얼굴을 목도한다.
조원의 마지막 대사 "사실 진심인 척 했을 뿐인데, 척하다보니 결국 진심이 되어 버렸구나"는 죽음을 눈 앞에 두고서야 자신의 진정한 정인이 누구인지 깨닫지만 너무 늦어버렸다. 조원 조씨부인 숙부인은 서로 어지럽게 마음이 향하지만 그 누구도 사랑이 이뤄지지 않는다.
영화 크레딧이 모두 올라간 후 유대감의 후실로 들어온 소옥(이소연)이 결국의 이 이야기의 최종 승자가 된다. 또한 권도령(조현재) 역시 언젠가는 과거에 급제할 것이고 아니면 조원처럼 한량으로 살지도 모른다. 그리고 소옥과 권도령 두 사람은 조원과 조씨부인처럼 끝없는 상처 게임에 빠져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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